구토와 눈물의 라이브를 처음으로 봤을 때, 무대 위에는 보컬 최원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막보다 신체를 진동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기능하는 듯한 조용훈(dydsu)와 최준용의 기타가 자욱한
음파를 발산하는 동안, 목소리는 그 소리를 발생시키는 주체의 시각적인 부재 속에서 검붉게
끓어오르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메탈, 아니 어쩌면 모든 종류의
‘음악’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배반하는 시도였다. 제스처, 몸짓, 활력, 헤드뱅잉, 어떤 식으로 구현되든
음악에서 ‘역동성’을 느끼게 만드는 가능성을 스스로 제거하는 것. 이윽고 적막함이라는 소리의 부재를
찢고 들어오는 듯했던 기타 노이즈조차, 초기의 목적을 망각한 것처럼 역동을 잃고 그 공간에 고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드론 메탈(Drone Metal)이라 불리는 장르의 특성이라고 편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스(Earth), 선 O)))(Sunn O)))), 커럽티드(Corrupted) 등의 수많은 선각자들을 간편하게 빌려오는
것만으로 구토와 눈물이란 밴드를 설명하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 2016년의 데뷔작 [Vomit
& Tear]로부터 한층 더 눅진하고 정체된 사운드스케이프와 구조로 발걸음을 옮기는 [+E-L]을 앞에
두고서는 그 석연찮은 감정이 더욱 명확해진다. 그것은 이 앨범이 들려주는 고통의 형태가 다른
밴드들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큰 차이가 없는 두 개의 음만이 계속해서 스트로크되는 가운데 안개 같은 불길한 노이즈가 귀 전체를
감싸도는 “Abamex”, 붕괴하는 듯이 파열하는 음과 또렷하지만 낮디낮은 멜로디가 교차하는 “Orthene”,
부유하는 드론 사운드를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Abamectin”… 지독할 정도로 반복적인 구조를
밀어붙이는 이들의 음악에서 우리는 역동성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는다. 그 소리의 풍광은 마치 어떤
식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권태감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한 듯한 감각이다. 사고, 재난, 전쟁, 악마 같은
사건과 상징으로서의 사악함 – 우리가 흔히 메탈이란 장르에서 접해 왔던 것들 – 이 아닌 지금 여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를 천천히 죽어가게 만드는 무언가.
최원겸의 목소리는 이 모든 것을 뚫으려는 듯한 그로울링과 비명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은 그 소리가
원래 가졌어야 했을 날카로움을 잃은 채 투명한 막을 씌운 것처럼 어떤 것도 관통하고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니까, 거기에 슬픔을 느끼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면서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침잠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유일한 시도가 그의 목소리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조차도 어떤 의미조차 느껴지지 않는 괴성이 아닌 이상 우리의 귀에 들리지조차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가능할까? 진동의 형태를 미세하게 바꾸는 쐐기 같은 기타
피드백을 끊임없이 반복시키는, 그리고 다른 어떤 곡보다도 우리의 귀 근처까지 접근한 듯한 비명을
들려주는 마지막 트랙 “Trilogy”에서, 구토와 눈물은 그것이 아주 조금이나마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틈 사이로 내비친다.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는 구토와 눈물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단어겠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반복과 권태, 노이즈와 비명의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 뒤틀린 쾌감은 “Trilogy”뿐만이 아닌 [+E-L]이라는 앨범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권태라는 느린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숙명은, 때로 그러한 권태 자체가
쾌락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것이 기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E-L]의 더러운 소리는 권태에 매혹당한다는 모순적인 경험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구토와 눈물로 가득 찬 이 늪 속에서, 당신은 느린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깨우칠
것이다.
정구원 (웹진 [weiv] 편집장)